600여년 전 서울의 모습
삼각산과 백악산 그리고 목멱산 아래 한강이 한
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. 서울은 산과 강으
로 이루어졌다. 한강은 바다인지 강물인지 세곡
선과 어선들로 매일 넘실거린다. 특이한 모습은
전혀 보이지 않는다. 자연 그대로다. 백악산 아
래 종묘와 인왕산 기슭 사직단을 지으니 한양의
모습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.
왕은 어디에 살 것인가? <주례고공기>에 왕은
‘북좌남면 좌묘우사’라 종묘와 사직단을 완성 후
백악산 아래 경복궁에 살았다. <시경>에 ‘군자
만년 개이경복’에서 이름을 따 큰 복 주는 경복
궁(景福宮)이 으뜸 궁궐이 되었다.
1395년(태조 4년) 왕이 사는 법궁이자 정궁인
경복궁 완공 후 도성을 쌓는다.
이루어졌다.
한강은 바다인지
강물인지 세곡선과
어선들로 매일
넘실거린다.
한양도성을 쌓아올린 사람들
당시 한양의 인구는 20여만 명이 채 되지 않았
다. 그런데 전국에서 19만7,400명이 올라와 98
일 동안 쉼 없이 도성을 쌓았다. 믿을 수 없는 공
사다.
농사가 시작되기 전 농한기 49일과 추수가 끝난
농한기 49일을 나누어 밤낮으로 쌓았다. 백악산
에서 시계방향으로 낙타산과 목멱산 그리고 인
왕산을 97구간으로 나누어 시행했다. 한양도성
18.627km에 성벽을 쌓고, 사대문과 사소문을 완성하니 비로소 대역사는 새로운 역사가 되었다.
한양도성 성벽과 성돌 하나하나에 조상들의 피
와 땀 그리고 눈물이 녹아 있었다. 보신각 새벽
종소리에 시작한 성 쌓기는 한밤중 종소리에 마
치니 사람들은 지쳐 쓰러졌다.
도성으로 갖춰지는 수도 모습
한양도성이 완성된 후 수도로써 권위를 차츰 갖
춘다. 도성 안 종묘와 사직단 그리고 경복궁이
그 위엄을 되살렸다. 도성 밖 성저십리까지 한강
은 도시와 지방의 경계이자 삶과 죽음의 생명선
이며, 뱃길 따라 수운의 시작과 끝이 바로 한강
이었다.
도성 안 경복궁 근정전과 경회루 2층 누각은 숭
례문까지 가장 높은 건물로 장안의 화제요, 600
여년 전 서울의 상징이었다. 또한 도성 안 청계
천과 도성 밖 만초천·홍제천·성북천은 한강을
향해 흘러갔다.
오대산에서 시작한 한강은 동네마다 지역마다
이름이 따로 있었다. 두물머리 양수리에서 송파
강을 지나 동쪽의 호수 동호, 목멱산 아래 경강,
만초천 만나는 용산강, 홍제천을 흘러 서강과 양
화진이 한양의 끝이자, 경기의 시작이었다.
행주산성 앞 잔잔한 호수 같은 행호, 한강과 임
진강이 만나는 교하, 김포와 강화 사이 염하, 마
지막 서해를 만나는 조강까지 한강은 큰 물줄기
가 되어 말없이 흐른다.
600년 서울의
역사이자,
대한민국의 살아
숨 쉬는 문화요,
생태 그 자체다.
서울의 역사 ‘한양도성’
한양도성은 600여년 전 만들어진 도읍지 성곽
이다. 4개의 산과 4개의 대문 그리고 4개의 소
문이 동서남북으로 이어진 건축과 토목의 집대
성이다.
청계천 위 경복궁 근정전을 중심으로 남북 일직
선상에 문들도 주도면밀하게 만들었다. 궁담길
따라 광화문에서 신무문 사이에 궁문이 있다. 흥례문과 근정문 그리고 향오문 및 사정문까지 법
궁 안 문들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. 또한 도
성에 남북으로 9개 도로와 동서로 9개 도로 그
리고 도로의 폭과 시장의 크기까지 계획과 원
칙 속에 이루어진 도시가 한양이다. 그 둘레에
18.627km로 이어진 성곽이 바로 한양도성(漢
陽都城)이다.
한양도성은 600년 서울의 역사이자, 대한민국
의 살아 숨 쉬는 문화요, 생태 그 자체다. 수많은
나라에 도성이 있지만 현재까지 성곽을 유지하
고 있는 도시는 드물다. 한양도성은 이제 유네스
코 세계유산이 되어야 한다. 길을 걷는 자가 세
상을 바꿀 수 있다. 한양도성 따라 600년 서울
을 함께 만나러 가볼까요?